백수론 百獸論 / 노창재

추교서 2021. 12. 20. 11:57

호랑이가 앞이마에 ‘왕(王)’자를 새기고도

바람에 수염을 맡기며 홀로 외롭듯

감춘 이빨. 감춘 발톱과 같이

무시로 드러내지 않는 법

뒤를 어슬렁거리되 기품을 잃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골짜기를 포효하되 주변을 다치지 않게 하며

먼발치에서 바라보아도 항상 위엄과 기백이 서려

배경을 따뜻하게 하는 풍경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고프고 주린 날이 오래오래 머물더라도

맑고 형형한 눈빛으로 견뎌 낼 줄 알아야 한다

눈발 휘몰아치는 매서운 들판에서도 한 겹 더

옷을 걸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선의의 경쟁을 피하지 않고 다수의 안녕한 질서 속으로

언제나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정의의 함몰, 위선과 병폐 횡횡한 골목을 마주치게 되면

그때는 가차 없이

이빨과 발톱을 세워 분연한 일전을 불사하여야 한다

 

다만, 죽어서도

가죽을 남겨서는 아니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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